시민주 공모를 통해 창단 자금을 마련한 뒤 13번째 구단으로 출범한 인천 유나이티드가 K리그에 발을 내딛은지 올해로 어느 덧 11년 차에 접어들었다. 오늘날 K리그 시·도민구단의 대표 주자로 나서기까지의 지난 이야기를 앞으로 매주 수요일 총 11차례에 걸쳐 총 11주간 여러분께 소개하려고 한다. <편집자주>
창단 준비... ‘시민주 공모’ 창단 자금 약 195억원 마련
첫 번째 이야기. 2004년 창단 그리고 첫 발걸음 편이다. 인천 유나이티드는 지난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에서 보여준 전 국민적인 축구를 향한 응원열기를 바탕으로 지역의 정체성 확보와 시민의 힘을 하나로 모으는 구심체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인천시민과 인천소재 기업 그리고 인천광역시가 함께 참여하는 시민구단으로 전격 탄생했다.
인천 유나이티드는 모기업의 후원을 받는 기업 구단이 아닌 시민이 만든 시민구단이라는 창단 이념에 부응하고 시민들을 직접 구단의 주인으로 모시기 위해 지난 2003년 10월과 2004년 1월 두 차례에 걸쳐 시민주 공모를 실시하여 약 4만 7000여건의 청약을 받아 약 195억원의 창단자금을 마련했고, 본격적으로 K리그 구단으로 나서기 위한 만발의 준비를 마쳤다.
이사회 만장일치 통과... K리그 13번째 클럽으로 출범
한국프로축구연맹 이사회는 지난 2003년 12월 12일. 서울 신문로 축구회관에서 인천 구단의 창단 및 K리그 참가에 대해 토의하기 위해 제 10차 이사회를 열었다. 이사회는 연맹가입금 10억원과 축구발전기금 30억원 중 10억원 등 총 20억원은 2003년 12월에 일시불로 납부하고, 나머지 20억원은 향후 2년 동안 각각 10억원 씩 분할 상환하는 조건으로 인천 구단의 K리그 참가를 만장일치로 승인했다.
이사회에 결정에 따라 인천은 대전 시티즌과 대구FC에 이어 K리그의 3번째 시민구단으로 정식 출범했다. 창단 승인이 떨어지자 인천은 더욱 발 빠르게 움직였다. 구단 공식 명칭을 인천 유나이티드로 확정한 것을 시작으로 시민들을 대상으로 구단 로고 및 엠블럼 온라인 설문조사를 벌였으며 GM대우, 대덕건설과 메인 스폰서 계약 체결을 체결하기도 했다.
‘초대감독’ 베르너 로란트 선임... 발 빠른 선수단 구성
이렇게 K리그에 참가하기 위한 모든 준비를 마쳤고, 가장 중요한 코칭스태프 및 선수단 구성이 남아 있었다. 먼저 감독으로는 독일 분데스리가 출신 베르너 로란트를 선임했다. 로란트 감독은 국내 프로축구사상 8번째 외국인 감독으로 K리그에 첫 발을 내딛었다. 그밖에 장외룡 수석코치, 김시석 코치, 미하엘 크라프트 GK코치 등이 로란트 감독을 보좌했다.
선수단 구성도 빠르게 이뤄졌다. 넉넉한 창단 자금 덕분에 원활한 선수 수급이 이뤄졌다. 터키 국가대표 출신 알파이 외잘란을 데려온 것을 시작으로 11억원을 들여 ‘지역 스타’ 최태욱을 안양 LG에서 영입했다. 또한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대표팀의 간판 수비수였던 이상헌과 성남 일화의 3관왕을 이끌었던 김현수 그리고 임중용, 김이섭, 전재호, 황연석 등 알짜배기들을 함께 데려왔다. 여기에 유럽 출신 안젤코비치, 라돈치치, 토미치와 일본의 마에조노도 함께 영입했다.
창단식과 함께 치른 공식 첫 경기... 감바 오사카 4-0 격파
어느정도 선수단 구성을 마친 인천 선수단은 2004시즌 리그 참가를 앞두고 본격적인 담금질에 돌입했다. 제주도에서 1차 전지훈련을 진행한 데 이어, 실전 감각을 키우기 위해 터키 안탈리아로 이동해 약 3주간 2차 전지훈련을 진행했다. 안탈리아에서 세르비아, 러시아 등 유럽 1부리그 강팀들과 총 8차례의 연습 경기를 치러 3승 2무 2패의 무난한 성적을 기록한 채 귀국길에 올랐다.
설레는 첫 시즌 개막을 약 한 달 앞둔 2004년 3월 1일. 인천은 구단의 출범을 대내외에 알리기 위해 창단식 및 첫 공식 경기를 가졌다. 상대는 일본 J리그의 명문구단 감바 오사카. 인천월드컵경기장에는 3만 5천여명의 구름 관중이 운집했다. 전반 26분 안젤코비치가 공식 첫 득점을 기록했다. 이후 라돈치치와 전재호 그리고 황연석의 연속골에 힘입어 4-0 대승으로 이날 경기를 마무리했다.
전기리그 최하위, 신생팀의 한계 여지없이 드러나
2004년 4월 3일. 인천은 전년도 FA컵 우승팀인 전북 현대를 상대로 홈 개막전을 치렀다. 이날 경기에서 인천은 0-0 무승부를 기록하며 나쁘지 않은 출발을 알렸다. 2라운드 포항 스틸러스와의 원정경기에서 아쉬운 1-2 패배를 기록했지만 3라운드에서 ‘디펜딩 챔피언’ 성남 일화를 상대로 1-0 승리를 거두며 3경기 만에 리그 첫 승리를 신고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이후 인천은 신생팀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 깊은 부진의 늪에 빠졌다. 거액을 주고 야심차게 영입했던 알파이는 이기주의로 팀 내 불화를 일으키며 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어지는 부진 속에 인천은 전반기 막판 대전과의 홈경기에서 김정재의 결승골에 힘입어 1-0 승리를 거두면서 분위기 반전을 모색했으나, 전기리그 최종전인 수원 삼성과의 원정경기에서 뒷심부족으로 아쉬운 2-3 패배를 기록하며 2승 3무 7패의 성적으로 최하위로 씁쓸히 전기리그를 마감했다.
알파이·안젤코비치 'OUT' 마니치·서기복·이정수 'IN'
야심찬 출발을 알렸으나 전기리그에서 기대와 달리 깊은 부진의 늪에 빠지며 팬들은 자연스레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후반기 도약을 위한 선수단 개편이 빠르게 이뤄졌다. 팀 내 불화를 일으켰던 알파이가 거액의 이적료를 주고 일본 J리그 우라와 레즈로 떠났으며, 창단 첫 골을 기록한 안젤코비치 역시 마찬가지로 일본 J리그의 세레소 오사카로 임대 후 완전 이적이라는 조건으로 팀을 떠났다.
새얼굴의 영입 작업도 동시에 이뤄졌다. FC서울에서 2군 무명 공격수였던 이정수가 인천으로 둥지를 옮긴 것을 시작으로 부평고 출신 플레이메이커 서기복이 전북에서 이적했다. 그밖에 과거 대우 로얄즈에서 맹활약을 펼쳤던 ‘바람의 아들’ 마니치가 인천 유니폼을 입었으며, 추가로 안양LG에서 활약했었던 세르비아 출신 미드필더 드라간도 함께 영입되었다.

정식 경기장이 아닌 보조경기장에서 프로축구를?
전기리그를 마침과 동시에 곧바로 컵대회에 돌입했다. 아테네 올림픽 기간동안 13팀이 단판 승부로 대회를 펼쳤다. 공교롭게도 이 기간 동안 2005년 아시아 육상 선수권 대회 개최를 대비한 인천월드컵경기장 육상트랙 보수공사가 이뤄졌다. 대책으로 숭의 운동장이 거론됐으나, 조명 시설이 없어 야간 경기 개최가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한여름에 주간 경기를 개최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고심 끝에 인천 구단이 내놓은 카드는 문학보조경기장이었다.
연맹의 승인을 얻어 인천은 컵대회 홈경기를 문학보조경기장에서 치렀다. 골대 뒤편으로 이동식 전광판이 설치되었고, 관중석에 이동식 화장실이 자리했다. 관중석으로 향하는 길에는 구수한 비료 냄새가 진동했다. 본부석 맞은편을 기준으로 좌측에 인천 서포터가, 우측에 상대편 서포터가 자리했으며 중앙에는 일반 팬들이 앉았다. 비록 열악한 상황이었지만 나름 전용구장과 비슷한 시야가 펼쳐져 오늘날 올드 팬들에게는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 있다.
‘깜짝 스타’ 방승환의 탄생과 돌아온 ‘바람의 아들’ 마니치
컵대회에서 ‘깜짝 스타’ 방승환이 탄생했다. 동국대 3학년을 마친 뒤 인천에 입단한 방승환은 184cm, 77kg의 체격에 빠른 스피드와 현란한 발재간을 두루 지닌 재목으로 입단 당시 팬들로 하여금 큰 기대를 모았지만 제대로 된 기량을 선보이지 못하며 이내 실망감을 안겼다. 그런 방승환이 컵대회 개막전 대구원정에서 멀티골을 기록한 데 이어 2라운드 울산 원정에서 귀중한 동점골을 뽑는 등 새로운 인천의 해결사로 발돋움하며 드높이 비상했다.
‘바람의 아들’ 마니치의 맹활약 또한 돋보였다. 마니치는 여름 이적시장을 통해 인천에 둥지를 튼 뒤 빠르게 팀에 융화되어 곧바로 팀의 주전 공격수로 발돋움했다. 마니치는 복귀전인 부산전에서 복귀골을 뽑더니, 대전과의 홈경기에서 30초 만에 득점포를 가동한 데이어, 전북전에 결승골을 기록하기까지 복귀 이후 무려 3경기 연속 골을 넣으며 녹슬지 않은 기량을 선보였다. 한편, 인천은 3승 6무 3패(승점 15점)의 성적으로 컵대회를 8위로 마감했다.
로란트 감독의 돌연 사임, 장외룡 체제 속 후기리그 4위 도약
전기리그를 최하위로 마친 뒤, 컵대회에서 중위권을 형성하며 후반기 반전을 위한 초석을 마련한 인천. 그러나 후기리그 개막을 앞두고 로란트 감독이 돌연 사임하는 사태가 발생하며 또 다시 삐걱거렸다. 폐렴을 앓고 있던 부인의 지병이 악화되어 더 이상 팀을 맡기 어렵다는 게 사임 이유였다. 인천은 새 감독 선임이 아닌 장외룡 수석코치의 감독 대행 체제로 후기리그를 치르기로 전격 결정했다.
다행히도 장외룡 감독 대행 체제 속 인천에는 새로운 활기가 불기 시작했다. 첫 경기인 대전원정 1-0 승리를 시작으로 차곡차곡 승점을 쌓아 올렸다. 공격과 수비 그리고 미드필더까지 전체적인 조직력이 서서히 갖춰지며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고, 리그 막판 ‘강팀’ 포항과 전북을 상대로 연승을 거두기도 했다. 인천은 4승 5무 3패(승점 17점)의 기록으로 후기리기를 4위로 마감하며 다음 시즌에 대한 가능성과 기대감을 동시에 안긴 채 희망을 노래하며 창단 첫 시즌을 무사히 마쳤다.
[②편] '2005년, 공포의 외룡구단의 거침없는 질주' 편은 다음주 수요일(6월 11일)에 업로드 됩니다.
글 = 이상민 UTD기자 (power1360@hanmail.net)
사진 = 남궁경상 UTD기자 (boriwoo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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